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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 월드비전 후원자 뭄바이사업장 방문 1

  • 2005.03.04

첫 날, 뭄바이에 도착해서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서 공항을 나설 때였다. 아이 두 명이 뒤따라 붙으며 돈을 달라고 손짓을 했다. 안 돼, 했는데도 졸졸 따라오고 있는 아이들을 현지 안내인이 보자마자 쫓아버렸다. 쫒기는 모습을 보자 불편해져서 서둘러 버스에 올라가 주저앉아 있었다. 문득 창밖을 보니 그 애들이 창가에 다가와 계속 달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나한테 달라붙냐, 하면서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기내식으로 나온 작은 땅콩 팩 두 개를 챙겨둔 것이 있었는데(나는 먹기 시작하면 남기지 않고, 손대지 않은 것은 챙겨오는 버릇이 있다.) 창문을 열고 던져주었다.
하나씩 받아들더니 확인을 한 후 활짝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었다. 받아들고 그냥 가버렸다면 뭐, 저런 것들이 있어, 하고 잊었을 텐데, 기분 좋게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자 불편했던 마음은 씻겨나가고 약간의 흐뭇함에 젖게 되었다. 다시 돌아와서 달라면 뭐든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돈도 아끼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되어있었지만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못내 아쉬움 같은 것을 느끼면서 숙소에 도착했다.

둘째 날, 월드비전 사무실을 방문해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설명을 듣고, 차를 마신 후 봉사활동에 나섰다. 학교에 도착해서 쓰레기장 청소를 하고, 그곳에다 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쓰레기를 걷어내고, 땅을 판 후 나무을 세우고, 흙을 골라 덮고 물을 주었다. 이것이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아쉬울 게 없는 시간이었다. 디지털 사진기로 아이들을 찍어주는 재미가 있었다. 사진을 찍은 후 되돌려 보여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활짝 웃기도 하고, 탄성을 내기도 하고, 옆의 아이와 뭐라 즐거운 대화를 하기도 했다.

첫 날, 뭄바이에 도착해서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서 공항을 나설 때였다. 아이 두 명이 뒤따라 붙으며 돈을 달라고 손짓을 했다. 안 돼, 했는데도 졸졸 따라오고 있는 아이들을 현지 안내인이 보자마자 쫓아버렸다. 쫒기는 모습을 보자 불편해져서 서둘러 버스에 올라가 주저앉아 있었다. 문득 창밖을 보니 그 애들이 창가에 다가와 계속 달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나한테 달라붙냐, 하면서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기내식으로 나온 작은 땅콩 팩 두 개를 챙겨둔 것이 있었는데(나는 먹기 시작하면 남기지 않고, 손대지 않은 것은 챙겨오는 버릇이 있다.) 창문을 열고 던져주었다.
하나씩 받아들더니 확인을 한 후 활짝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었다. 받아들고 그냥 가버렸다면 뭐, 저런 것들이 있어, 하고 잊었을 텐데, 기분 좋게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자 불편했던 마음은 씻겨나가고 약간의 흐뭇함에 젖게 되었다. 다시 돌아와서 달라면 뭐든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돈도 아끼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되어있었지만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못내 아쉬움 같은 것을 느끼면서 숙소에 도착했다.

둘째 날, 월드비전 사무실을 방문해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설명을 듣고, 차를 마신 후 봉사활동에 나섰다. 학교에 도착해서 쓰레기장 청소를 하고, 그곳에다 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쓰레기를 걷어내고, 땅을 판 후 나무을 세우고, 흙을 골라 덮고 물을 주었다. 이것이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아쉬울 게 없는 시간이었다. 디지털 사진기로 아이들을 찍어주는 재미가 있었다. 사진을 찍은 후 되돌려 보여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활짝 웃기도 하고, 탄성을 내기도 하고, 옆의 아이와 뭐라 즐거운 대화를 하기도 했다.

첫 날, 뭄바이에 도착해서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서 공항을 나설 때였다. 아이 두 명이 뒤따라 붙으며 돈을 달라고 손짓을 했다. 안 돼, 했는데도 졸졸 따라오고 있는 아이들을 현지 안내인이 보자마자 쫓아버렸다. 쫒기는 모습을 보자 불편해져서 서둘러 버스에 올라가 주저앉아 있었다. 문득 창밖을 보니 그 애들이 창가에 다가와 계속 달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나한테 달라붙냐, 하면서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기내식으로 나온 작은 땅콩 팩 두 개를 챙겨둔 것이 있었는데(나는 먹기 시작하면 남기지 않고, 손대지 않은 것은 챙겨오는 버릇이 있다.) 창문을 열고 던져주었다.
하나씩 받아들더니 확인을 한 후 활짝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었다. 받아들고 그냥 가버렸다면 뭐, 저런 것들이 있어, 하고 잊었을 텐데, 기분 좋게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자 불편했던 마음은 씻겨나가고 약간의 흐뭇함에 젖게 되었다. 다시 돌아와서 달라면 뭐든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돈도 아끼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되어있었지만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못내 아쉬움 같은 것을 느끼면서 숙소에 도착했다.

둘째 날, 월드비전 사무실을 방문해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설명을 듣고, 차를 마신 후 봉사활동에 나섰다. 학교에 도착해서 쓰레기장 청소를 하고, 그곳에다 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쓰레기를 걷어내고, 땅을 판 후 나무을 세우고, 흙을 골라 덮고 물을 주었다. 이것이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아쉬울 게 없는 시간이었다. 디지털 사진기로 아이들을 찍어주는 재미가 있었다. 사진을 찍은 후 되돌려 보여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활짝 웃기도 하고, 탄성을 내기도 하고, 옆의 아이와 뭐라 즐거운 대화를 하기도 했다.

우리를 보고 반갑게 맞이해 주던 뭄바이 아이들

그러다 보면 나도 사진이 찍고 싶어져서 어느 한 아이에게 청하면 (수줍음을 타는 아이들도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라 보고) 순식간에 아이들이 몰려들어서 아이들 틈에 묻힌 채로 단체사진 같은 것을 찍게 되었다. 애써 한 두 아이와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내 모습이 들어간 사진들은 보기가 거북스러웠다. 아이들은 인형만큼 작아서 귀퉁이에 조연처럼 있고, 나만 거인처럼 나오는 것이었다. 마치 70년대의 사장님 모습처럼 얼굴이 번들거리고, 살찐 모습으로 빙그레 웃고 있는 것이었다. (일행들은 알겠지만, 나의 실 물은 빼빼하다. 이 아이들이 초등학생이어도 아기처럼 작고, 가늘고 여린 것이다.) 그래도 아이들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몇 번이나 돌려봤다.

셋째 날, 후원 아동의 집을 방문했다. 어제 봉사활동을 끝낸 후 빈민촌의 자조모임을 찾아갈 때도 그랬지만, 온갖 더럽고 누추한 것들이 늘여져 있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애 ·어른 할 것 없이 거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곳 저곳에다 배설물이 많아 둥그런 배수로 위로 걸어갔다. 닭장만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고 습한 골목 끝의 반지하가 첫 번째 후원아동의 집이었다. 순간적으로 어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원아동을 만나러 가는 길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서 밖에서 서 있으려고 했는데, 들어오라 하길래 궁금하기도 해서 발을 들여 놓고서 깜짝 놀랐다. 사람이 사는 집이었다. 그렇구나, 사람은 짐승과 다르구나, 그 좁은 공간이 깨끗하고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소꿉장난 같은 살림살이였지만,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선선하고 상쾌한 공기, 깔끔한 바닥, 아늑한 방, 그들만의 안식처가 있었다. 금붕어를 키우는 어항도 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방문한 집도 안과 밖이 완전히 달랐다. 두 번째 집은 형편이 좀 나은 듯했다. 공간이 좁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곳에는 문 옆 선반위에 낡은 카세트와 테이프 꽂이가 있었다. 그 중에는 비틀즈의 테이프도 있었다. 천장에는 작은 새장 속에 파란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다. 세 번째 집은 풀풀 먼지가 날리는 도로가에 있었는데, 반지하인데도 실내는 환했다. 선반위에 놓여있는 스텐리스 그릇에서 밝은 빛이 반사되어 나왔다.

얼마나 야무지게 닦았는지 몇 개 되지도 않은 식기들을 가지런하게 엎어두었을 뿐인데도 반짝 반짝 빛이 나서 눈부실 정도였다. 그때 집안을 이렇게 들여다봐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들이 그들만의 공간을 꾸미고, 그것을 지켜가기 위해서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너무 가볍게 여긴 것 이다. 외부의 환경이 열악할수록 자기만의 안식처가 필요할 것이다. 그 좁은 공간에서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잠을 자고, 꿈을 키우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가난해서 낡은 어항, 앵무새 한 마리, 비틀즈 테이프, 스텐리스 그릇 몇 개 밖에 없지만 언젠가는 크고 넓은 새 어항에 갖가지 물고기를 넣고, 앵무새 한 쌍을 함께 키우며, 유리 그릇 가득히 맛있는 음식이 넘치도록 담고 싶을 것이다.

빈민가에서 만난 인도 아이들

후원아동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우리들의 선입견은 어긋나 있었다. 사진 속에 있는 후원아동은 반듯하고, 꽉 차 있었다. 초등학교 일학년이라면 우리나라 아이만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진 속의 아이를 축소해 놓은 듯한 현실의 아이를 만나고는 모두 어쩔 줄 몰라 했다. 뭐라 말을 잊지 못하고 어떡해, 어떡해 하고 있었다. 손을 잡았는데, 쥘 것이 없었다. 후원아동을 만나서 반가움을 나누고, 이야기도 하며, 잠시 동안이나마 기쁨을 주겠다는 기대는 손을 잡아보고, 안아보는 순간 어떤 서글픔에 싸여 허망하게 되고, 우리들의 말문을 닫게 만들었다.

그들도 차마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낯선 이국 사람들에게 살림이랄 것도 없는 집안을 낱낱이 드러내 놓고 어쩌지를 못했을 것이다. 말이 없는 어색함을 사진 찍는 것으로 대신했다. 세 번째 방문한 결연 아동 집에서는 가족사진을 찍어 주고자 했으나 아버지가 어디로 가고 없어서 한참이나 시간이 지체되었다. 할 수 없이 집을 나서는데, 그 아버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음료수 박스를 어께에 메고 저기에 오고 있었다. 우리들을 대접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의 아들이 공부할 수 있게 이국에서 후원하고 있는 후원자에게 음료수라도 대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갖가지 색깔의 종류가 다른 음료수 병들이 상자 속에서 절반을 드러내고 있었다. 짐작컨대, 우리들의 취향이 염려되어서 여러 가지 음료수를 고르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린 것 같았다. 글을 적고 있는 지금도 초등학교 5학년짜리 내 아들만한 몸의 크기를 가진 그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상자를 한쪽 어깨에 메고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다시피 걸어오고 있었다.

후원아동 가족과 함께

결연아동을 만난 후, 후원 유치원을 방문했다. 유치원의 아이들 중에서도 후원받는 아동이 있다했지만, 비교적 모두가 건강하고, 생기가 넘쳤다. 우리 일행 중에 다행히 초등학교 교사가 있어서 레크레이션 시간을 가졌는데, 아이들이 곧잘 따라했다. 선생님은 몇 번이나 “대한민국, 짝짝짝, 인디아 짝짝짝”을 하고, 기억나는 한국동요를 무작위로 불렀는데도 아이들은 지치지 않고 또박또박 따라 했다. 낯을 가리지 않고 정겹게 다가온 아이들 덕에 함께 손동작을 맞추며 신나게 놀기도 하고, 풍선이 터질 때는 같이 놀라기도 했다. 이곳에서 떠나올 때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유치원 아이들과 함께 노래 부르는 모습

점심을 먹은 후 AIDS 센터를 방문해서 감염자 자조모임 회원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개인적으로는 처음으로 AIDS 감염자들을 보게 되었는데, 외모는 정상인들과 꼭 같았다. 그렇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막연하게 환자 같아 보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인도 전통 복장을 하고, 장식을 한 감염자들은 그 모습이 화려해서 마치 건강한 무용수처럼 보였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감염자들끼리 서로 도우며 산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에이즈감염은 곧 죽음이라는 공식으로 받아들이는데,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폐암 운운해도 흡연은 곧 죽음이라는 공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듯이 이들도 언젠가 죽더라도 죽는 순간까지 사는 것에 삶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 굶주려 죽는 것이 에이즈로 죽는 것보다 더 흔하기 때문에 에이즈가 우리사회에서 만큼 죽음과 연결되어 두렵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굶주림을 두려워한다고 해서 굶주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에이즈를 두려워한다면 감염의 확산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감염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고, 감염자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사업이 필요하다는데 공감을 하고 왔다.

HIV/AIDS 감염자 모임 참가자들과 함께

저녁에는 자그마한 강당에서 에이즈 확산을 막기 위한 청소년 연극관람이 있었다. 우리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자 조금씩 관람객들이 늘어나더니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발 디딜 팀이 없을 정도로 꽉 채워졌다. 조금만 틈이 보이면 헤집고 들어와서 자리를 잡지만, 어느 누구도 거부하지 않고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신기했다. 먼저 자리를 잡았다고 내세우거나 밀치거나 싸우는 법이 없었다. 그 와중에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서 나와 가까운 곳에 앉았는데, 주변의 작은 아이들에 비해 큰아이여서 금방 눈에 띄었다. 헝클어진 머리에는 검불과 먼지가 앉아 있고 옷도 더러웠다. 내가 그 모습을 보고 그 소녀와 눈을 맞추었다. 이곳에서 아이들과 시선이 맞닿으면 그 찰나에 피하려 하지 않음이 바로 파악되기 때문에 가볍게 미소를 띠우면 아이들도 금방 환하게 웃는다.

어떤 아이들은 악수를 청하기도 하고 카메라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금방 한동네 아이처럼 친근해진다. 하지만 이 소녀와 시선을 마주쳤을 땐 어딘가 어색했다. 미소를 띠고자 했지만 뭔가 가로막고 있었다. 그냥 텅 빈 눈으로 길게 눈만 맞추고 있다가 어쩌지 못하고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려 다른 아이를 보았고 나와 눈을 맞춘 소녀는 일어나 뒤로 빠져 나갔다. 무엇이 그녀를 불편하게 했는지, 혹은 상처를 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로 인해서 공연장을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발 돌아가진 말아달라고, 어딘가에 자리를 잡아달라고 마음속으로 부탁을 하면서 공연하기 전까지 계속 그 소녀를 찾아보았다. 공연이 시작되고 나서도 빽빽하게 서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라도 공연을 보고 가기를 바라면서 디지털 카메라로 뒤에 있는 사람들을 확대해서 살펴보았지만 그 소녀를 찾을 수는 없었다. 춤과 음악이 곁들어진 무대공연에 이어 에이즈 확산이 가져오는 상황을 연극으로 보 여주고 있었는데, 그 소녀를 찾느라 뭔지도 모르고 시간을 보냈다.

넷째 날, 뭄바이 시내로 나갔다. 차창가로 달리는 차량들을 보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수출한 차들이 셀수 없을 만큼 많았다. 국산차가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기분좋은 하루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도심으로 들어서자 기분은 얼어붙고 말았다.
길가에는 시체처럼 거지들이 널려있었다. 둘째날 방문했던 빈민지역과 비교가 안 되었다. 그 곳 사람들에겐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집과 가족과 희망이 있었지만 이들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집은 육체적 휴식의 공간임과 동시에 정신적 안식처이자 의지처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박스만한 집이라도 집이 있다는 것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고, 가족과 함께 눈을 마주보고 음식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의 기다림이 있다는 것이다. 거리를 지나가면서 알 수 있었다. 집 없는 사람들이 기력 없이 늘어져 있는 것은 집 있는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누워 자는 것과는 확연이 다르다는 것을.

인도문을 지나가는 거리에도 거지들이 곳곳에 늘어져 있었다. 흔하기 때문에 무감각하게 지나쳤지만 유달리 눈에 띄는 경우가 있었다. 남편은 담벽에 기대어 늘어져 있고, 아내가 작은 아이를 안은 채로 큰아이와 함께 길을 막고 앉아 있었는데, 지나가려하니 먹을 것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머니에 있던 사탕과 초콜릿을 모두 꺼내 주었더니 돈을 달라는 것이었다. 안돼요, 하고 지나치려다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굶주려도 재미있게 해주면 좋아할 것 같았다. 그래서 동의를 구하고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었다. 활짝 웃거나 까르륵 웃음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들도 웃지 않았고, 아내는 고개만 꺼덕일 뿐 무표정했으며, 벽에 기댄 남편은 카메라를 눈앞에 갖다대도 기력이 없어서 들여다보지를 못했다. 순간 섬칫했다. 죽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피하고 싶었다. 겸연쩍게 카메라를 거두어 걸음을 재촉했다. 주차장이 있길래 애써 떨쳐버리고 싶어서 국산차가 몇 대나 되는지를 세고 있었다. 바로 옆에 누가 있어 돌아보니 아까 그 아내가 다가 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흔쾌히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있는 대로 주었다. 동전을 헤아려보는 아 내의 표정은 역시 어두웠고, 뭐라고 요구를 하고 싶어 하면서도 돌아서 가는 것이었다. 자동차를 세다 말고 모 임의 장소로 와서 얼마를 줬나 따져보니 주나마나 한 돈이었다. 내가 그랬다. 지갑 안에 지폐가 있었는데도 마 냥 그것은 내 것으로만 알았다. 나눠줄 생각은 못하고, 꼭꼭 지켜서 나를 위해 쓰겠다고 깊숙이 숨겨뒀던 것이다. 뒤늦게서야 버스 안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더운 땀을 쭈삣쭈삣 흘리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마지막 날, 돌아오기 위해 뭄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무심코 걷고 있는데, 방송국 PD가 마이크를 갖다 대고 질문을 했다. 인도를 방문한 느낌이 어떤가, 했다. 부끄럽다고 했다. 그땐 당황스러워서 그 실체를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내내 부끄러웠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고자세로 인도를 방문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결연아동의 집안까지 훤히 들여다보면서도 당당하게 권리인듯 받아들인 것이 미안하고 부끄럽다. 나 때문에 연극관람을 못하고 빠져나간 그 소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아직도 남아있다. 누추한 모습을 들킨 것이 수치스러워 그 자리를 떠났다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유심히 바라봤던 것은 다른 아이들에게도 그랬듯이 미소를 지을 시점을 찾고 있었던 것 뿐이였다고. 그래도 그러고 있었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건 인도문 근처 길에서 만난 죽어가는 가족을 도와주지 못한 것이다. 그때 남편의 모습에서 시커먼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었다. 그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남기를 바란다. 두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가난을 벗어던져, 언젠가는 맛있는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두고, “그 시절에는 누구나 굶주렸다”라고 옛날이야기 하듯 회상하면서 행복에 겨워 했으면 좋겠다. 지금의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축복은 있겠지만, 바라건대 내가 누리고 있는 축복의 십분의 일이라도 그들에게 내려졌으면 좋겠다. 간절히 바래본다. 내가 만난 그 시점이 죽음으로 가는 길목이 아니라 그들이 생명을 키워가는 잠깐의 시련일 뿐이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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